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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작성자 park so hee  |   local 대한민국
  • Jul 02, 2016,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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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ed by park so hee   |   Jul 02, 2016, 10:59   |   Korean
  • 미국 독립운동 속 위인들
  • 지금 세계 최강국은 미국이다. 누구보다도 많은 자본과 뛰어난 기술, 창의력으로 세계 경제를 선도해나간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사실 미국이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한 지도자들의 영향이 컸으리라 생각한다. 세계 역사의 흐름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던 미국독립전쟁 속 유명하고 훌륭했던 위인들을 살펴보자.
    조지 워싱턴은 1775년부터 1783년까지 벌어진 미국 독립 전쟁에서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활동하였다. 처음에는 미국의 국민들이 그를 국왕과 같은 군주로 인식하여 서로 거리감을 느꼈으나, 점차 미국의 건국과 혁명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한 정치인으로 등극했다. 워싱턴은 미국 독립 전쟁 첫 전투인 보스턴 전역의 렉싱턴 콩코드 전투부터 파리 조약으로 독립을 승인 받을 때까지 총사령관으로서 복무하였다. 워싱턴은 한편으로는 금방이라도 와해될 것 같았던 대륙회의를 주재하고, 각지에서 모인 결속력 없는 군대를 통솔하면서, 동맹국인 프랑스와 의견을 조율하여야 했다. 1783년 전쟁이 끝난 후 워싱턴은 자신의 농장으로 돌아가 개인적인 삶을 살았다. 당시의 영국의 국왕인 조지 3세는 워싱턴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소문에 대해 "만약 워싱턴이 그리한다면, 그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일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그는 바로 미국의 아버지, 초대 대통령이다. 워싱턴은 1789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연방정부가 수립된 후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정부 각 부서의 관례와 임무에 대한 기초를 놓았다. 워싱턴은 1799년에 향년 67세로 사망하였다. 헨리 리는 장례식에서의 연설에서 워싱턴을 "전쟁에서도 으뜸, 평화에서도 으뜸, 그리고 그의 국민들 마음 속에서도 으뜸"(First in war, first in peace, and first in the hearts of his countrymen)이라 칭송하였다. 역사학자들은 꾸준히 그를 가장 훌륭한 미국 대통령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미국의 1달러 지폐에는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미국의 독립 선언문 작성에 참가한 일원들 중에 한 명이었다. 그는 인쇄업자, 신문발행인, 저술가, 과학자, 발명가, 외교관, 정치가, 등등 많은 역할을 수행하며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인물 중에 한명이 되었다. 1748년 그의 사업이 많이 번창함에 따라서, 프랭클린은 과학에 뜻을 두어 사업을 대리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봉급을 받으면서 과학을 탐구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1740년대 초기에 그가 발명한 난로(프랭클린 스토브)는 아직도 생산되고 있으며, 1752년에 그의 유명한 실험인 '연 실험'을 행하였고, 번개가 전기를 방전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러한 연구들의 결과로, 또 프랭클린의 실용적인 면의 재현으로, 그의 피뢰침이 발명되었다. 후에 복초점 렌즈가 발명되는데 이것도 프랭클린의 대표적인 발명품이다. 그해 전 식민지 체신장관 대리 가 되어 우편제도를 개선하였고 54년 올버니회의에 펜실베이니아 대표로 참석, 최초의 식민지 연합안을 제안하였다. 57년 펜실베이니아의 이익을 위하여 교섭을 벌일 목적으로 영국에 파견되어 식민지에 자주과세권을 획득하고 귀국하였다. 64년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인지조례의 철폐를 성공시켰다. 75년 귀국하여 제2회 대륙회의의 펜실베이니아대표로 뽑혔고 76년 독립선언 기초위원에 임명되었다. 그해 프랑스로 건너가 아메리카-프랑스동맹을 성립시키고, 프랑스의 재정원조를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83년 파리조약에는 미국대표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현재 미국 100달러 지폐에 새겨진 인물이다.
    강인한 나라는 훌륭한 지도자들의 리더십에 의해서 발전하고, 성장한다. 미국이 이토록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미국이라는 나라가 수많은 인재와 리더들을 키울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전세계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꾸어버린 미국의 독립전쟁은 많은 인재들이 힘을 합쳐 달성해낸 성과였으며 역사 속 새로운 시대로의 도약의 표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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