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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정태은  |   local 대한민국
  • Jun 10, 2017,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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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ed by 정태은   |   Jun 10, 2017, 10:28   |   Korean
  • 조선 후기 '개혁'을 통해 중흥을 꿈꾼, 정조
  • 조선 후기 왕들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왕 두 사람을 꼽으라면 영조와 정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막상 사람들에게 그 두 사람의 업적을 말하라고 하면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아도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정작 잘 모르는 것들이 많기에, 이번 기사 주제는 알듯말듯한 정조에 대해 다루기로 했다.


    (1) 규장각에서 인재를 키우다

    정조는 영조에 이은 탕평정치를 실시하는데, 정치를 끌어나가기 위해 자신의 편의 사람들을 만들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규장각'이다. 규장각은 겉보기에는 그냥 왕실의 도서관처럼 보이지만, 이는 사실 인재를 키우기 위함이었다. 대놓고 자신의 사람을 만들기 위해 규장각을 세운다고 하면 다른 신하들의 반발이 심할 것을 예상했기에 일종의 위장 전술을 펼친 것이다. 아래는 규장각의 사진이다.

    규장각

    (사진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2)장용영

    인재들을 키우기 위해 규장각을 설치했다면, 이번에는 왕권 유지, 즉 군사를 위해 왕의 직속군대인 장용영을 만들었다. 장용영은 조선 최강의 전투부대인데, 정조가 즉위한 후에 훈련도감의 정예무사를 선발해 호위를 맡긴 것이 장용영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홍복영의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왕의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경과에 합격한 무사들을 흡수하여 장용위를 설치하고 약 500명의 인원을 5대로 나누어 편제하였다. 1788년 장용영으로 개칭하였고, 1793 도성 중심의 내영()과 그 외곽인 수원 성곽 중심의 외영()으로 확대 편제하여 기존 5군영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1795년 다른 군영의 군대를 흡수해서 5사  23초의 편제를 갖추었고 장용사가 이를 지휘하였다.

    반차도 원본 보기 - 장용영/가마부대(선기대)


    (3)수원으로의 천도를 계획하다

    그는 규장각과 초계문신제를 통해 정치적인 세력을 마련하고, 장용영을 통해 군사적 기반을 다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건 자신의 지역적인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는데, 기존의 수도인 한양에서는 그의 입지가 약했기에 아예 새로운 곳을 수도로 삼으려 했다.  그곳이 바로 정조가 비밀리에 발굴한 곳, 수원이었다.

    수원화성

    수원화성

     수원 화성은 조선 후기에 세워진 계획도시이며,  정조와 실학자들이 지은 성곽 도시로, 조선 후기 토목 건축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처음부터 계획하여 거주지로서의 읍성과 방어용 산성을 합하여 성곽도시로 만들었다. 전통적인 축성 기법에 과학적 기술을 활용하였으며, 이전의 성곽에 흔치 않았던 다양한 방어용 시설을 많이 첨가하였고,  주변 지형에 맞춰 자연스럽게 조성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위 세가지 개혁 말고도 더 많은 개혁들이 줄을 이었다.

    금난전권 폐지,   공노비 처지 개선, 도망 노비를 쫓는 관리인 추쇄관 혁파, 서얼들의 차별 철폐 등에도 앞장서는 등 다양한 개혁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또한, 정조의 개혁에서 가장 관심을 가질 만한 부분은, 시행하고 끝난 게 아니라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관리를 했다는 것인데, 백성과 관련해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민생과 가장 밀접한 관리인 수령들에 대한 감시였다. 불시에 민생을 살펴 수령의 부정이 적발되면 용서하지 않았고, 감시관인 암행어사를 보낼땐 언제나 구체적이고 상세한 지침을 통해 제대로 체크하게 했다.  

    그러나 이런 개혁의 산물은 만개하기도 전에 역사 속으로 퇴장하였다. 현재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이었다. 그의 사후 장용영이 혁파되고, 정조가 육성했던 세력들이 대거 축출되는 불운을 겪었다. 서울 중심의 벌열 세력에 의한 정치, 사회, 경제적 독점은 심화되었다.



    그렇다면 정조가 꿈꾸었던 목표나 이상은 무엇일까? 정조는 스스로 군사()로 자처하였다. 율곡 이이의 설명에 따르면, 태초에는 백성들이 새처럼 거처하고 생활이 도리가 구비되지 않았으며, 인문()도 구비되지 못하였고, 임금도 없이 소박한 생활을 하다가 시간이 경과하면서 분란이 생겼는데, 이때 성인()이 출현하였다고 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이 이 성인을 임금으로 삼음으로써 군사()의 직책을 갖게 되었고, 이로써 백성의 생업이 편안해지고 하늘의 질서가 밝아졌다고 하였다. 유교에서 이상적인 군주상으로 제시하는 요․순이 이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결국, 정조 역시도 선왕인 영조가 그랬던 것처럼 군사가 되기를 원했고, 개혁과 대통합을 통해 백성들의 생업이 편안해지고 질서가 잡힌 세계를 꿈꾸었던 것이 아닐까?


    -사진, 내용: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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