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26대 왕 고종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실질적인 집권을 하게 되었고, 그는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수교를 거부하는 등 쇄국정책을 시행하였다. 1873년 흥선 대원군이 하야함으로써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이 완화 되었고 문호 개방의 필요성을 내세우는 통상 개화론이 대두되었다.
-평등 조약의 체결, 강화도조약
1876년(고종 13년) 2월 강화도에서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조약으로 일본의 군사력을 동원한 강압에 의해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다. 일본은 국내 사족들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고, 구미 제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기 위한 방법으로, 조선과 청나라의 시세를 살피어 부산항에서 함포 위협 시위를 벌이고 강화도에서 운요호 사건을 유발하였다. 결국 이것이 빌미가 되어 1876년 2월 27일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암호명 '여우사냥' 을미사변
일본은 러시아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고종의 왕후 민비를살해하고,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 뒷산에 묻어버렸다. 증거를 완전히 없앴다고 생각했지만 고종과 황태자, 미국인 교관 다이, 러시아인 사바틴, 그 외 많은 조선인이 참혹한 현장을 목격하였고 이로 인해 명성 황후 시해 사건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자세히 알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