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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박민주  |   local 대한민국
  • Jun 11, 2017,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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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ed by 박민주   |   Jun 11, 2017, 20:02   |   Korean
  • 비운의 왕세자, 소현세자
  •  청의 군신관계 요구를 거절하고 벌어진 병자호란의 결과인조15(1637)130일 인조는 삼배구고두례 라는 삼전도의 굴욕을 맛보았고 그의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나라의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
     청나라에 도착한 소현세자가 마주한 것은 전쟁에서 패배한 조선의 현실이었다포로로 끌려온 조선인들은 노예시장에서 사고 팔리며 청나라 사람들의 돈벌이에 이용되고 있었고, 청나라의 군주는 소현세자에게 '조선은 당장 전쟁에 필요한 식량과 물건을 지원하라'며 협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에도 좌절하지 않고 소현세자는 조선을 위해 심양에서 외교와 대외활동을 벌였다. 조선의 물건을 청나라로 가져와 거래를 하거나 청나라의 황폐한 땅을 일궈 많은 곡식을 생산하는 것 등이 있었는데, 이 때 번 돈은 조선 노비들을 사서 다시 조선에 돌려보내는 일을 하는 데 사용되거나 또는 청나라의 신분있는 사람들과 친분을 쌓는데 이용되었다그렇게 친해진 인물 중 한 명으로 청나라 황제의 동생인 도르곤이 있었는데 도르곤 과의 친분은 청나라의 압박을 막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소현세자의 덕은 청나라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되었다또한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거부감이 없던 소현세자는 서양 선교사 아담 샬과 교류하며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고, 그것은 조선의 앞날과 이미 전쟁으로 황폐해진 조선을 일으키고자 했던 소현세자의 이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인조 23(1645), 9년의 포로생활 끝에 소현세자는 수많은 신문물과 새로운 사상을 가지고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소현세자의 머릿속은 다시 조선을 일으킬 이상으로 가득했을 것이다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조선은 그리 이상적이지 못한 곳이었는데,
     유교가 절대적이었던 당시 조선청나라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나빴던 조선에서 청의 물건은 그닥 반가움을 사지 못하였고 서양문물과 천주교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이었다아버지 인조 또한 소현세자의 태도를 오랑캐에게 정신을 팔아먹은 증거물로 보았다.
     자신이 그리던 이상과는 반대되는 현실과 맞딱드린 소현세자는 설상가상으로 귀국한 해 423일 학질마저 앓으며 갑작스레 쓰러지고 마는데쓰러진 지 3일이 되는날 생을 마감한다.
    당시 소현세자의 죽음에 관하여 아직까지도 병사이냐 독살이냐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데인조실록 46인조 23년 6월 27일 에 독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증거가 실려있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外人)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하였다.』 인조실록 46권, 인조 23년 6월 27일
     
     소현세자의 죽음을 두고 독살이라는 소문은 떠돌았지만 인조는 이에 대한 조사를 피했으며 소현세자의 진료를 맡은 어의를 처벌하지도 않았다간혹 조선에서는 병의 치료를 위해 독약이나 극약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왕실에서의 독살사건을 막기위해 독살을 막기 위한 도구들도 존재했다하지만 세자의 치료에 독약을 사용했다는 기록은 없으며이러한 도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신이 독살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왕실 내에 힘 있는 자가 소현세자의 죽음을 의도적으로 계획하였음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그러한 상황에서 인조는 의료진을 처벌하지 않았고, 과거 인조의 소현세자를 향한 태도로 미루어보아 사람들은 인조가 소현세자를 죽였다는 가정도 배제할 수 없었다.
     실로 인조는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사람으로써 자신도 언제 반란으로 내쳐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라고 한다그런 그에게 소현세자의 입국은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의 만나는 아버지의 기쁨 어린 부정(父情)이 아닌 왕의 자리를 노리는 아들의 귀국을 부정(不正)하는 마음이 더 컸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인조의 불안함이 낳은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원래 세자가 죽으면 왕세자의 맏아들인 원손이 대를 잇는 것이 왕실의 법인데 인조는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다그에 그치지 않고 독살사건의 배후로 소현세자의 세자빈인 강씨를 지목하여 사사하고 그녀의 아들들은 제주로 유배를 보내게 되는데전염병으로 인해 첫째와 둘째가 죽는 것으로 소현세자 일가의 비극은 끊이질 않았다.
     이렇듯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한 많은 의혹이 아직 풀리지 않은 미궁으로 남아있었고오늘날 사람들은 덕 있고 현명한 소현세자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효종이 아닌 소현세자가 인조의 뒤를 잇는 조선의 왕이 되었다면 조선후기의 사회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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