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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차준원  |   local 대한민국
  • Jun 10, 2017,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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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ed by 차준원   |   Jun 10, 2017, 11:18   |   Korean
  • 세계2차대전-스탈린그라드 전투(Сталинградская битва)
  •  스탈린그라드 전투(러시아어: Сталинградская битва,독일어: Schlacht von Stalingrad) 는 1942년 8월 21일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스탈린그라드 시내와 근방에서 소련군과 추축군* 간에 벌어진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전투에서 약 200만 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인간사에서 가장 참혹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이 전투는 독일 제6군과 다른 추축국 군대의 스탈린그라드 포위와 이후의 소련군의 반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전투는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전투를 기점으로 소련군의 전투력은 대폭 향상되어 독일군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럼 이 참혹한 전투에 대해 알아보자.
     
     우선 이 전투의 배경을 알아보자. 1941년 6월 22일 독일군과 추축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여 소련을 침략했다. 1941년 여름과 가을에 극심한 타격을 입은 소련군은 12월의 모스크바 공방전을 기점으로 반격에 나섰다. 탈진하고 겨울 장비가 부족한데다가 보급로가 약해진 독일군은 모스크바에 대한 진격을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1942년 봄까지 독일군은 전선을 안정화했다. 중부 집단군의 손실이 컸기 때문에 모스크바에 대한 재공격은 기각되었다. 독일군의 군사 철학은 무방비한 곳을 공략하여 최대의 성과를 얻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모스크바에 대한 공격은 적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라고 봤다. 게다가 독일 육군 최고 사령부(OKH)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이 참전했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히틀러는 미국이 유럽전에 참전하기 전에 동부 전선을 끝내거나 또는 최소하려고 했다. 또 코카서스의 대 유전 지대를 점령하여 소련군의 연료를 고갈시키고, 부족한 독일군의 연료 문제도 해결하며, 가능하다면 북아프리카에서 동쪽으로 진격하는 독일군과 중동에서 합류를 꾀하기도 하였다.
     
     히틀러에게 스탈린그라드 점령은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이곳은 카스피 해와 북부 러시아를 잇는 수송로인 볼가 강의 주된 산업 도시였고, 이곳을 점령하면 코카서스로 전진하는 독일군 좌익의 안전이 확보되었다. 게다가 스탈린의 이름이 붙은 도시를 점령한다는 것은 이념적으로나 선전 면으로 소련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스탈린도 이 점을 알고 있었고, 총을 들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이곳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독일군은 위와 같은 이유로 코카서스의 유전 지대를 점령하기 위해 러시아 남부의 스텝 지대를 꿰뚫는 공세를 시작하였다. 히틀러에게 유전 지대의 점령은 다른 장군들이 권고하는 모스크바 점령보다 더 중요한 목표였기 때문에, 러시아 남부 전선에 더 많은 병력과 지원을 했다. 이 작전의 암호명은 “청색 상황”(독일어: Fall Blau)이었다. 여기에는 독일 6군, 17군, 4기갑군, 1기갑군이 참가했다. 청색 상황은 최종적으로 6월 28일에 개시되었다. 독일군의 공격은 성공적으로 시작되었다. 소련군은 넓은 스텝 초원에서 거의 저항을 하지 못하고 동쪽으로 무질서한 패주를 시작했다. 저항선을 구축하려는 여러 시도가 다른 독일군 부대의 측면 포위로 좌절되었다. 소련군은 7월 2일 하르코프 북방의 포위망과 일주일 후 밀레노보와 로스토프 근방의 포위망에 갇혀 각각 섬멸되었다.
    <"청색 작전"의 모식도>-wikipedia.org
     
     
     이제 독일군의 의도는 소련군 지휘관들에게 분명해졌다. 소련군의 7월 작전 계획은 스탈린그라드를 방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독일군의 공세 앞에 동쪽으로 후퇴하던 소련군 부대는 스탈린그라드에 진입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스탈린그라드의 동쪽은 폭이 넓은 볼가 강이었고, 강을 넘어 다른 소련군 부대들이 배치되었다. 이런 부대들이 새로 62군으로 재구성되었다. 그리고 인근의 64군(슈밀로프 중장 지휘)과 함께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을 이루었다. 소련군의 목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스탈린그라드 시를 사수하는 것이었다.
     
     이토록 전운이 감도는 전장에서의 전투는 시가에 대한 독일 공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도심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다. 스탈린은 방위 부대의 사기를 위해 민간인이 시를 떠나 피난 가는 것을 금지하였다. 피난 행렬이 방위 부대의 소통에 방해되면 안 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여자와 아이를 포함한 민간인이 방위망을 구성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8월 23일 단 하루의 대규모 폭격으로 많은 인명이 죽고 많은 건물이 돌과 잿더미로 변했다. 이날 독일 공군 폭격기 600대가 도시에 공격을 개시해서 불지옥으로 만들었고, 시민 약 4만여 명 이상이 사상하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이토록 폐허가 된 도시의 잔해 위에서 소련군 제62군과 제64군은 무너진 집과 공장을 이용하여 방어 거점을 구축할 수 있었다. 전투는 치열했고 잔혹했다. 이 도시에 처음 도착한 소련군 사병의 평균 예상 생존 시간은 24시간 미만이었다. 게다가 1942년 7월 27일에 내려진 스탈린의 227호 명령에 따르면 상부의 명령 없이 위치를 벗어나는 모든 자는 즉결 처분에 처해졌다. 이 명령에 따라 수많은 소련군 후퇴병과 탈주병이 이런 즉결 처분으로 사살되었다. 물론 스탈린그라드에 투입된 독일군도 커다란 손실을 보고 있었다. 그 이유는 독일군의 군사 원칙은 기갑, 보병, 공병, 공군의 지상 지원이 잘 조화된 협공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련군은 여기에 대응하여 항상 독일군에게 가능한 가깝게 근접전을 시도했고, 추이코프는 이런 전법을 “껴안기”라고 불렀다. 이런 전법 때문에 독일군 보병은 홀로 화력 지원 없이 싸우거나 혹은 아군의 화력 지원에 따른 손실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양군의 손실은 막심했기 때문에, 계속 새로운 부대가 시내로 투입되었다. 특히 소련군은 수천 킬로미터 밖의 시베리아나 극동에서 지원군을 끌어오기도 했고, 심지어는 해군의 수병까지도 동원했다. 독일군은 돌파구가 보이지 않자 중화기를 시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전쟁은 점점 더 참혹해지고 있었다.
     
     이에 가을에 스탈린그라드 방면의 전략적 작전 지도를 맡은 바실레프스키와 주코프는 시내로 병력을 축차 투입하는 것으로는 독일군을 격퇴할 수 없음을 깨닫고 대규모 공세를 통해 전세를 뒤집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스탈린의 승인을 얻어 일방적 공세 작전을 입안했다. 작전 계획은 독일군을 시내에 붙잡아두고, 양 측면을 공격하여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을 포위하는 것이었다.
     
     
     
    <"천왕성 작전"의 모식도>-wikipedia.org
     
     
     이를 위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시에는 겨우 거점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만 병력을 지원했고, 시의 서북쪽과 서남쪽의 스텝 지대에 대규모 병력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이 작전은 “천왕성 작전”으로 명명되었으며, 독일 중앙 집단군을 겨눈 화성 작전과 함께 실시될 예정이었다. 독일군은 특히 북쪽 좌익이 허점이었는데, 이곳은 독일군에 비해서 잘 훈련되지 못하고 변변한 장비와 무기도 부족한데다 사기도 엉망인 크로아티아군과 헝가리군, 루마니아군이 수비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1월 19일, 소련군은 “천왕성 작전”을 실시했고, 독일의 군사적 지원이 거의 없었던 독일군 양 측면에 주둔하던 루마니아 제 3군과 제 4군은 산산이 분해되었다. 이 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독일군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이에 히틀러는 당시 공군 총참모장인 한스 예숀네크에게 고립된 제 6군에게 공중 보급을 할 수 있겠냐고 물었고, 한스 예숀네크는 별 생각 없이 가능하다고 보고했다.
     
     이토록 한스가 자신감이 있었던 이유는 이런 공중 보급은 사실 처음이 아니었고, 규모는 작았지만 1년 전 모스크바 공방전 직후 데미얀스크 고립 지대에 갇힌 독일군에 성공적으로 사용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 몇가지 다른 점은 데미안스크에서는 일개 군단을 위한 보급이었지만, 이번 경우는 일개 야전군 전체였다. 또한 그동안 소련군 전투기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훨씬 개선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데미얀스크의 성공은 히틀러에게 확신을 주었고,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도 며칠 후 여기에 찬성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공중 보급 계획은 즉각 실패로 드러났다. 소련군의 밀집된 대공 포화와 전투기는 독일 공군의 수송기들에 심한 손실을 입혔다. 또한 악천후도 독일군의 수송 효율을 저하시켰다. 결국 평균적으로 일일 필요량의 10%만 보급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가끔씩 엉뚱한 수송 물자가 도착하기도 하였다. 어떤 때는 20톤의 보드카와 여름 군복을 가져왔는데, 이것은 이 상황에서 전혀 필요 없었다. 안전하게 도착한 수송기는 돌아올 때 사령부에서 재능이 있다고 판단된 지휘관들이나 기술적 전문가들 및 부상병을 날라 왔다. 제6군은 기아에 시달리고 있었다.
     
     포위망에 갇힌 독일군은 소련군의 맹공 때문에 시의 외곽으로부터 시내로 철수했다. 이에 따라 그동안 공중 보급이 이루어지던 피톰닉과 굼락크 두 공항을 잃었다. 독일군은 이제 기아에 허덕일 뿐만 아니라 실탄도 떨어져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독일군은 소련군이 포로를 처형할 것이라는 생각에 결사적 항전을 계속했다. 특히 소련군 출신 독일 부역자들은 잡히면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결사적이었다. 그들을 공격하던 독일군을 거꾸로 포위한 소련군은 포위망을 강화하여야만 했다. 다시 한 번 피비린내 나는 시가전이 시작되었고, 이번에는 독일군이 볼가 강 강둑으로 밀려났다.
     
      1943년 1월 소련군은 (1) 모든 포로에 대한 안전 보장, (2) 독일군 환자와 부상병에 대한 의료 지원, (3) 포로의 개인 소지품 소지 허가, (4) 정규 식량 지급, (5) 전쟁이 끝난 후 송환 등의 조건을 내걸고 파울루스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냈다. 이는 심리전 차원에서 선전 삐라로 만들어져 포위된 독일군에게도 뿌려졌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이를 거부했고 다시 전투가 재개되었다.
     
     1월 20일 크로아티아 의용군 부대를 이끌던 빅토르 파비치치가 전사하고 다음 날 소련군이 폐허가 된 백화점 건물에 차렸던 사령부로 진입하자, 파울루스는 이런 히틀러의 기대를 저버리고 항복하고 말았다.
     2월 2일 항복한 독일군 포로는 22명의 장성급을 포함한 9만 1000명이었다. 이들은 기아와 질병에 싸울 기력을 잃어 도저히 더 싸울 수 없었다. 처음에 스탈린그라드에 갇혔던 25만 명의 추축국 병사 중 항복한 포로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사망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단일 전투였다. 이 전투는 199일간 지속되었다. 전투의 범위가 광대했고, 사상자 수가 지나치게 많을 것을 두려워한 소련 정부의 금지 때문에 정확한 집계도 어려웠다. 독일 측 자료에 따르면 대략 독일이 40만 명, 루마니아가 20만 명, 이탈리아가 13만 명, 헝가리가 12만 명에 달하는 인명 손실을 봤다고 한다. 전투에서 살아남아 포로가 된 9만 명도 1943년 봄에 대부분 티푸스로 사망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소련에 억류되어 전후 복구 사업에 강제 동원되다가 최종적으로 1955년 독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자는 5천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독일도 소련군 포로를 가혹하게 다루긴 마찬가지였다. 5만 명에 달하는 소련군 출신 독일 부역자들도 소련군에 사살되거나 잡혀 처형되었다. 각종 문헌 자료에 따르면 소련군의 손실은 총 1,129,619명이라고 한다. 478,741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고 650,878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독일 제6군과 제4기갑군이 시내로 진격해 온 첫 주의 공습에서 4만여 명의 소련 민간인이 시내나 교외에서 사망했다.
     
     이토록 끔찍한 전쟁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 라는 책의 저자 안토비 비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돌이킬 수 없는 참상을 피하려면 권력자의 오만과 독선을 경계해야 한다.”
     
      이러한 명령을 내리는 것은 지도자 이지만, 그 결과와 피해는 모두 국민들의 몫이 된다. 우리가 이 참혹한 역사를 기억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두 노력하는 자세를 가진다면, 이런 끔찍한 전쟁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러시아 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의 현재 이름)에는 추모탑이 세워져 있다. 자유의 여신상보다 크다고 한다. 전쟁으로 스러져간 생명들은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이 다시금 뼈저리게 다가온다.
     



    *추축군: 세계 2차 대전 당시 미국과 연합군에 대적하여 전쟁을 한 세력들의 군대. 독일군, 루마니아군, 슬로바키아군 등이 있다.
     
    <독일군과 교전하는 소련군>-wikipedia.org
     
     
     
    <폐허가 된 스탈린그라드>-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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